2015년 4월 29일 수요일

이등병 일기 8 - 생활관보다 밖이 더 따뜻함 / 저는 자기 싫습니다

<생활관보다 밖이 더 따뜻함>
2015.4.24.목

  이제 완전히 봄인 것 같다. 내가 쓰는 생활관은 건물 뒤쪽 구석에 있어서 볕이 잘 안 들어서 낮이 되어도 손이 약간 시려울 정도로 춥다. 계속 생활관에 있으면 추우니까 앞으로 허 이병이 담배 피우러 나갈 때 따라 나가서(난 비흡연자이지만) 햇빛을 쐬기로 했다. 흡연장에서 좀 떨어진(그래서 담배 연기가 안 오는) 갈색 페인트칠 된 정자에 앉아 보니까 엉덩이가 따뜻하다. 앞으로 그 미리 데워진 정자에 가서 시린 손도 녹이고 해야겠다. 봄이라서 기쁘다. 민들레도 많이 피었다.





<저는 자기 싫습니다>
2015.4.29.수

  두번째로 국지도발 훈련을 하게 됐다. 첫번째와 다른 점은 이날 훈련이 철야로 진행되는 거였다. 즉 진지에 갔다가 그날 돌아오는 게 아니라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에 부대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하룻밤을 자야하기 때문에 준비할 게 더 많았다. 스키파카도 챙겨야 하고, 여분의 의류대와 모포, 판초우의까지 챙겼다. 선임들은 진지에서 먹을 간식까지 챙겨갔다.

  주간에는 다른 국지도발 훈련과 다른 점이 별로 없었다. 진지도 예전에 갔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가랑비가 조금 왔던 것만 달랐다. 그날 아침 본 일기예보에서 남쪽지방은 호우주의보가 발령됐다고 하고, 강원도에도 비가 올 수 있다고 해서 걱정했지만 금방 가랑비가 끝나서 다행이었다.

  재밌는 건 야간이었다. 야간의 날씨는 주간의 날씨와 매우 달랐다. 낮에는 비가 그치자 조금 덥고 땀이 났는데, 밤이 되자 서늘해지더니 새벽에는 추워지기까지 했다. 어느정도였냐면, 손난로에 모포, 스키파카까지 사용해야 버틸만할 정도였다.

  밤 10시까지는 다 같이 경계를 서다가 이후에는 한명씩 자고, 나머지 인원이 경계를 서기로 했다. 몇번 순서가 되어 자고 일어났는데, 나중에는 그냥 안 자고 앉아서 경계를 서다가 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좁고 어두운 진지에서 앉아있다가 일어나서 장구류를 풀고, 손을 더듬어 모포를 찾아 덮고, 우의도 덮고, 이러기가 귀찮았다. 게다가 시간이 다 돼서 일어날 때 체온이 조금 낮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싫었고, 다시 장구류를 차고 바스락바스락 움직이기가 성가셨다. 그래서 나중엔 다른 선임이 계속 자도록 두고, 난 앉아서 경계를 했다. 그편이 훨씬 덜 얼어죽을 것 같고 편했다.

By 대한민국 국군 Republic of Korea Armed Forces [CC BY-SA 2.0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2.0)], via Wikimedia Commons


  밤은 재미있었다. 늦은 시간에 듣는 귀신 얘기나 옛날에 부대에서 자살한 사람 이야기 등, 사람을 오싹하게 하는 얘기도 했다. 내가 있는 진지 주변에는 가로등도 없어서 굉장히 어두웠다. 그나마 달빛이 강해서(거의 보름달) 도로쪽이 조금 보일 정도였다. 검열관이나 대항군이 오지 않도록 숲속을 유심히 봐야 했는데, 거의 안개낀 것처럼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가끔 잡담거리가 떨어지면 사방이 고요한 때가 왔고, 그때면 주변의 아주 작은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어서 풀숲 사이로 개구리가 뛰어다니거나, 고양이나 오소리가 돌아다니는 것도 알아챌 수 있었다. 가끔 땅바닥에 있는 마른 나뭇가지나, 낙엽이 부서지거나 바스락대는 소리도 났는데, 그때마다 검열관이나 대항군이 온 게 아닌지 의심이 들면서 초조해지고, 긴장이 많이 됐다. (다행히 아무도 오지 않았다)

  선임들이 모두 자고 나만 남았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의 적막감과 평온함이 좋았다. (약간 무섭긴 했지만) 하늘을 보면 어두운 나뭇가지와 잎 사이로 별이 수없이 많이 반짝거리고 있었고, 다른 산을 보면 '저기 어딘가 다른 선임들이 있으면서 언젠가 이쪽을 볼 때도 있겠지'하는 생각도 들면서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밤이 무사히 지나가고 아침에 해가 뜨자, 굉장히 보람있게 느껴졌고 밤 사이 죽지 않고 다음날을 맞게 된 것이 참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때 선임들이 다 자고 있어서 무척 좋았다. (집에서도 가족들이 다 자고 나만 일찍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정말 신기한 건 그렇게 날씨가 춥다가도 동이 트자 금세 더워졌다는 것이다.

  입고있던 방한용 잠바를 벗고 핫팩을 진지 벽에 놔두고 진지에서 나와 기지개를 펴니까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계속 다리를 쪼그리고 앉아있어서 다리가 저렸는데 거기서 나오니까 다리 저린 것이 싹 사라졌다. 위장을 살짝 더 하고 따뜻한 햇빛을 쬐면서 기다리니까 행보관님이 아침을 갖다 주셨다. 상당히 이른 시간에 갖다주셔서 조금 놀랐다. 선임들이 깨지 않게 산을 내려가 음식을 받아서 다시 올라갔다. 음식을 갖고 갔을 때 옆 진지 선임이 밥을 받으러 미리 와 계셨고, 자고 있던 우리 진지 선임들을 발견하시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선임들을 깨우셨다.

  그렇게 몇 시간 있다가 철수 명령이 떨어졌고 우리는 부대로 돌아왔다. 뿔뿔이 흩어졌던 병사들이 꾀죄죄한 몰골로 다시 트럭 뒷칸에 모이자, 몇몇은 간밤에 잘 있었는지 서로 안부를 물었고, 몇몇은 피곤한 얼굴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특별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모두들 무사히 복귀했고, 그 점에 만족했다. 훈련을 많이 하면 짜증나겠지만 가끔 이 정도 해보는 건 나름 할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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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1. 마치 밴드오브~ 원작을 읽는 듯한..^^ㅎ
    윈터스의 메모일기를 훔쳐보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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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어떤 느낌일까..?
    상상하고 그려보는데 반도 못그리겠소~
    검고 푸른밤.. 여명의 새벽.. 갖잡은 물고기같은 싱싱한 사유에 감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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